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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대탐구)보국전기공업
경영관리본부 2014-05-15 10:40:51 3,922회
성장 과정…인간 곽기영 ‘인생 그 자체’
모터 생산으로 쌓은 노하우 발전기 국산화로 이어져
태양광발전시스템·개폐기까지 신시장 개척 순항 중


“아버지 손을 잡고 보국전공사(현 보국전기공업) 간판이 올라가는 걸 지켜봤다. 그때가 내 나이 7살 때였다. 53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보국전기공업(대표 곽기영)의 시작은 이렇듯 초라해 보일 정도로 미미했다. 그리고 53년이 지난 지금, 당시 보국전공사는 발전기 업계의 ‘산증인’이자 ‘대표 브랜드’ 보국전기공업으로 성장했다.
보국전기의 탄생과 함께했던 더벅머리 소년은 어느새 머리가 희끗한 환갑의 나이가 됐다.
소년이 청년이 되고, 얼굴에 주름이 하나 둘 생기는 동안 보국전기도 끊임없이 변화했다. 곽기영 대표에게 보국전기는 평생의 동반자, 아니 인생 그 자체였다.


◆깡통 주워 변압기 수리…모터로 ‘비상’

“전쟁이 끝나고 10년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지. 그때 아버지(곽종보 회장)가 보국전기를 설립했어. 공업 자체가 거의 없던 시절이었고, 모두가 힘들었지.”
당시 전기는 매우 귀한 것이었다. 방 두개를 밝히기 위해 전등 한 개를 사용했던 때. 벽에 구멍을 뚫어 가운데에 전등을 두고 빛이 양쪽으로 퍼지게 만들었던 때다.
전기로 사업을 한다는 생각 자체가 거의 없던 그 당시 보국전기는 변압기, 모터 수리를 업으로 시작했다.
대구에서 고교를 중퇴한 곽종보 회장이 호구지책삼아 전기수리공으로 나선 것이다.
고물상에 버린 전기기기를 주워, 분해하고 조립하면서 기술을 쌓아갔다. 변압기 외함을 만들 자재가 없어 깡통을 주워다 썼다. 함체를 숯불에 건조했다.
이렇듯 고된 일에도 곽종보 회장은 항상 성실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불평 한번 없었고, 다쳐도 쉬지 않았다. 그리고 이 같은 노력은 절대 배신하지 않았다. 사업 규모는 점점 커졌다. 기술력을 쌓아나간 결과 섬유 배틀 짜는 모터를 직접 국산화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당시 국내는 섬유 산업 호황이 일고 있었다. 우리나라 전체 수출액의 대부분을 섬유가 차지하던 때였다.
보국전기의 모터는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만드는 족족 나갔다. 그야말로 없어서 못 파는 시기였다.


◆제조 1호 발전기 탄생…국산 대표 브랜드 BOKUK ‘스타트’
하지만 섬유 산업 호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인건비가 상승하면서 섬유산업 비중이 점차 줄어갔다. 대신 기계공업이 발전하면서 빈자리를 차지했다.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곽 회장은 발전기 쪽으로 눈을 돌렸다. 당시 수입산이 대부분이었던 발전기를 수리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발전기와 모터는 용도는 달랐지만, 원리는 비슷했다. 모터 생산으로 쌓은 노하우를 기반으로 발전기를 수리하면서, 경험과 기술력을 쌓았다.
나중에는 직접 만들어도 되겠다는 자신감이 붙었다. 그리고 1980년, 보국전기 제조 1호 발전기가 드디어 탄생했다. 20kW짜리 등대용 발전기였다. 이 발전기는 군산항만청에 들어갔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발전기 브랜드 ‘BOKUK(보국)’의 시작이었다.
곽기영 대표가 보국전기에 입사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2차 오일쇼크로 국내 산업 전체가 흔들릴 때였고, 보국전기도 이 여파로 힘들어하던 시기였다.
당시 대학원생이었던 곽 대표는 회사가 힘들다는 소식에 학업을 그만두고 아버지를 돕기 시작했다.
곽 대표는 입사한 뒤 영업 현장에 바로 뛰어들었다. 발전기에 대한 지식은 일천했지만, 발로 뛰며 열심히 일했다. 엔진이 뭔지, 압 미터가 뭔지 그때 처음 알았다.
그리고 첫 번째 수주에 성공했다. 42kW 발전기 두 대를 치안본부에 납품하는 일이었다. 이때까지의 모든 고생을 보상받는 짜릿함이 느껴졌다.
직원들과 함께 고생한 결과 발전기 사업은 점차 커져갔다.
모터 사업이 보국전기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해가 지날수록 발전기 비중이 늘어만 갔다. 모터는 사양사업으로, 발전기는 신성장동력으로 성장한 것이다. 결국 1985년, 발전기 매출이 모터 매출을 뛰어넘었다.
발전기 사업만으로 20억~30억원 정도의 매출을 올릴 때였다. 보국전기는 이듬해 모터 생산을 멈추고, 발전기 제조에 주력했다.
선택은 탁월했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은 그야말로 대박의 기회였다. 건설 붐이 일었고, 용접에 필요한 발전기 수요가 급격히 늘어났다.
1990년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일했다. 여기저기서 물건을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대금을 미리 받고 한달 후에 물건을 줄 정도였다.


◆신사업·신시장 창출 노력 지속…독보적 위치 고수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특수가 끝난 후에도 보국전기는 멈추지 않았다.
발전설비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전력공사에 등록을 마친 뒤 1994년부터 발전설비를 납품하기 시작했다. 백령도 1~3호기를 설치하는 등 국내 기업 중 처음으로 도서지역에 발전설비를 출하했다.
해외 시장도 넘보기 시작했다.
1990년대 초반부터 일본 수출을 시작했다. 일본에 납품한 보국전기 동체는 세트로 만들어져 세계로 팔려나갔다. 당시 일본 시장은 까다롭기로 유명했고, 국내산의 불모지나 다름없었기에 보국전기의 선전은 더욱 빛났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동남아시아로 범위를 넓혔으며, 이후로도 성장을 거듭해 왔다. 현재는 20개가 넘는 국가를 무대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신사업도 지속적으로 발굴했다.
정부의 온실가스 저감과 분산형 전원 확대 움직임에 맞춰 천연가스엔진을 활용한 열병합발전시스템을 3년에 걸쳐 개발했다. 보국전기의 가스 열병합시스템은 종합효율 87%를 넘어서는 고효율 제품으로, 시장에서 그 성능을 인정받고 있다.
여기에 750kW와 2MW, 3MW 급 영구자석(PMG) 타입 풍력 발전기와 고효율 태양광발전 시스템 ‘스마파(SMaFA)’를 개발하는 등 신재생에너지 분야로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이중 스마파는 태양전지의 최소 단위인 모듈까지 이상 지점을 탐지해 운영효율을 20% 높일 수 있는 신개념 태양광 시스템으로, 보국전기의 미래 성장동력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보국전기는 아울러 에코 부하 개폐기를 시작으로 한전 개폐기 시장에 출사표를 던졌다. 개폐기 사업은 아직 걸음마 단계에 불과하지만, 지중 개폐기와 해외 시장까지 염두에 두고 지속적으로 키워갈 방침이다.
이처럼 보국전기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제품의 품질을 높이는 한편, 신시장을 창출하기 위한 도전을 지속했고, 우리나라 발전기 업계의 독보적인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곽기영 대표는 “세계는 넓고 경쟁할 곳도 많다.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며 “기술력과 영업력을 끊임없이 키워 세계적인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자료원 : 전기신문 김병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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